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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함정 구간에서 통화정책이 힘을 못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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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함정 구간에서 통화정책이 힘을 못 쓰는 이유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낮추고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었는데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고 물가마저 오르지 않는 구간이 있습니다. 평소라면 금리 인하와 유동성 공급이 소비와 투자를 자극해야 하는데, 실제로 이런 국면의 통화량과 물가, 대출 지표를 함께 놓고 비교해보면 돈을 아무리 풀어도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않고 어딘가에 고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유동성 함정’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구간에서는 통화정책이라는 강력한 도구가 힘을 쓰지 못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유동성 함정이란 무엇이고, 어떤 조건에서 나타나는가

유동성 함정은 중앙은행이 시중은행에 통화를 아무리 공급해도 금리를 더 낮추거나 경제를 자극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로 미래에 디플레이션이 예상되거나 총수요가 크게 부족한 시기에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조건이 명목금리가 이미 0%에 가깝게 내려간 ‘제로금리 하한’입니다. 금리가 이 하한에 도달하면 중앙은행은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 금리를 낮춰 경기를 부양할 수 없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는 시중에 돈이 풀리면 이자율이 떨어지고, 낮아진 이자율이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비를 자극해야 하지만, 유동성 함정 구간에서는 이 연결고리 자체가 끊어져 버립니다.

이자율 채널이 작동을 멈추는 이유

케인즈의 유동성 선호 이론에 따르면, 통화정책은 기본적으로 금리에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경제를 자극합니다. 그런데 금리가 이미 0%에 가까워지면 채권을 보유하는 것과 현금을 그대로 들고 있는 것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거의 없어집니다. 이자를 거의 주지 않는 채권을 사느니 현금으로 들고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중앙은행이 아무리 통화를 추가로 공급해도 그 돈이 채권 매입이나 대출로 이어지지 않고 그대로 현금성 자산에 머무르게 됩니다. 결국 통화정책이 경제를 움직이는 유일한 통로였던 ‘금리를 통한 자극’이라는 채널 자체가 막혀버리는 셈입니다.

실제 사례로 본 일본,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의 한계

이 현상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 사례가 일본입니다. 일본은행은 2001년 3월부터 5년간 양적완화를 시행했지만, 이 기간 소비자물가는 오히려 1.57% 하락했습니다. 시중에 돈을 풀었는데도 물가가 떨어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후 2016년 도입된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서도 비슷한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3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최저 0.5% 수준까지 떨어졌는데도 주택 구입 수요는 오히려 전년보다 줄었고, 절반이 넘는 일본 기업들이 아예 차입 없이 경영을 이어가면서 은행들이 새로운 대출처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더 상징적인 것은 예금을 은행에 맡기면 수수료 등으로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다는 불안감에, 개인들이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이른바 ‘개인금고 열풍’까지 불었다는 점입니다. 금리를 마이너스로 만들어서라도 돈을 풀겠다는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을 은행 밖으로 밀어내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은 셈입니다.

실제 사례로 본 미국, 본원통화 3배 증가에도 반응 없던 물가

비슷한 현상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에서도 관찰됐습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2008년부터 2011년 사이 미국의 본원통화량이 세 배 가까이 늘었는데도 상품가격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 중앙은행이 대규모 양적완화로 시중에 유동성을 쏟아부었지만, 그 돈의 상당 부분은 실물경제로 흘러가지 못하고 은행 시스템 안에 그대로 쌓여 있었습니다. 금융위기 직후 가계와 기업이 빚을 줄이는 데 몰두하는 이른바 ‘대차대조표 불황’ 국면에서는, 아무리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겠다고 해도 애초에 돈을 빌리려는 수요 자체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왜 화폐가 늘어도 경제는 반응하지 않는가

이런 현상의 근본 원인은 통화량이 늘어나는 속도와 그 돈이 실제로 경제 안에서 돌아다니는 속도가 서로 다르게 움직인다는 데 있습니다. 중앙은행이 돈을 공급해도 은행이 그 돈을 대출로 내보내지 않고 여유자금으로 쌓아두거나, 가계와 기업이 빚을 갚는 데만 그 돈을 쓰면 화폐가 유통되는 속도 자체가 떨어집니다. 실제로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경제에서는 통화량 지표가 빠르게 늘어나는 동안에도 소비나 투자 관련 지표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괴리가 나타나는데, 이는 돈이 시중에 많이 풀렸다는 사실과 그 돈이 실물경제를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통화정책만으로는 부족한 이유와 다른 처방

이런 구조를 고려하면 유동성 함정 구간에서는 통화정책 하나만으로 경제를 되살리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대차대조표 불황의 관점에서 보면, 가계와 기업이 부채 축소에 집중하는 시기에는 아무리 금리를 낮춰도 차입 수요 자체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직접 지출을 늘리는 재정정책이나 구조적인 경제 개혁이 통화정책보다 더 실질적인 처방으로 꼽힙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나 양적완화 발표만으로 경기 반등을 기대하기보다, 실제 대출 증가율이나 민간 소비 지표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유동성 함정 여부를 가늠하는 현실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am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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